하정웅은 한국 전통 회화의 핵심인 수묵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동양적 미학과 현대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온 작가입니다. 전통 수묵화가 지닌 여백, 선, 번짐의 철학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인의 감성과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을 통해 수묵화의 가능성을 확장했습니다. 하정웅은 단지 기법의 계승자에 머무르지 않고, 사유와 참여, 나눔을 예술로 실현한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수묵화에 담긴 현대적 감각, 예술적 철학, 그리고 사회적 실천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1. 화가 하정웅의 현대적 감각
하정웅의 예술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변주(Variation)’에 기반합니다. 수묵화는 수천 년 동안 동양화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 왔지만, 현대미술에서는 종종 고리타분하거나 고전적인 장르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하정웅은 이러한 편견을 정면으로 깨뜨리고, 수묵이야말로 오늘날 감성과 정신을 담아내는 데 적합한 매체임을 증명해 왔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산수화 형식을 차용하되, 그 구도나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매우 실험적입니다. 격식 있는 산과 물의 배치에서 벗어나, 흐트러진 구도, 빠른 붓질, 때로는 붓이 아닌 손과 몸을 이용한 표현으로 수묵의 경계를 넓혔습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수묵이 단지 회화적 매체가 아니라, 정서와 움직임, 정신의 흐름을 담는 매체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수묵화에서 여백은 단순한 공간의 공백이 아닙니다. 하정웅은 여백을 ‘무의 공간’이 아닌 ‘에너지의 공간’으로 바라봅니다. 먹의 짙음과 번짐 사이에서 생성되는 긴장감, 여백에서 느껴지는 정적의 울림은 작품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정신적인 몰입을 유도합니다. 또한 하정웅은 ‘선’에 집중합니다. 그의 선은 대상의 외형을 묘사하는 선이 아니라, 마음의 궤적, 존재의 흔적을 그리는 선입니다. 이러한 선은 빠르게 지나가는 붓질 속에 우연과 필연을 동시에 담아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움직이는 정지화면’을 보는 듯한 감각을 줍니다. 이처럼 그의 수묵화는 동양화의 기법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철학과 표현은 지극히 현대적이고 주체적입니다.
2. 예술적 철학
하정웅은 동양의 수묵화와 서양의 추상미술 사이에서 독자적인 접점을 만들어낸 작가입니다. 그는 특히 20세기 서구에서 등장한 추상표현주의의 방식과 자신의 수묵 작업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창출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표현’보다 ‘행위’입니다. 그는 수묵화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작가의 몸과 의식이 개입된 ‘과정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의 대형 작업에서는 이 같은 철학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수십 미터의 천 위에 먹을 붓고, 온몸으로 화면을 휘젓는 듯한 퍼포먼스를 통해 그는 예술이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와 해석, 성찰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 과정은 마치 행위예술(Performance Art)과도 같으며, 관객은 단지 작품을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그 제작 과정까지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하정웅은 또한 물성과 우연의 아름다움에 주목합니다. 먹이 종이 위에 번지고 흘러내리는 과정을 통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연의 질서’와 ‘우주의 이치’를 읽어냅니다. 이는 동양 철학에서 강조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태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의 수묵이 지닌 깊은 정신성을 보여줍니다. 하정웅의 수묵화는 때때로 구상적인 형태를 완전히 배제한 완전한 추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인간의 감정, 시대의 고통, 존재에 대한 물음이 깊숙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검은 먹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기쁨도, 고통도, 침묵도.” 그의 수묵은 색을 쓰지 않아도 풍부하고, 단순한 형식 안에 복잡한 감정과 사유를 담아냅니다.
3. 사회적 실천
하정웅은 예술가이면서도, 수집가, 기증자, 교육자, 후원자로서 다면적인 삶을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는 예술이 개인의 영광이나 경제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평생 수많은 작품을 기증하고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가 기증한 작품 수는 무려 2000점 이상이며, 이 중 상당수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특히 재일동포 작가들, 한국의 근현대사를 몸으로 살아낸 작가들, 사회의 주변에 위치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알리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기증은 단지 물리적인 ‘작품의 이동’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후세에 전하고,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행위로 평가받습니다. 하정웅은 “예술은 기억의 저장소이며, 시대의 증언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수묵화가 단지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 시대의 감정을 담고, 사람들의 아픔과 희망을 공유하는 매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작품은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술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후배 양성에 힘썼으며, 단지 기교와 기술이 아닌, 예술가의 ‘정신’을 중요하게 강조했습니다. 그의 생애와 철학은 많은 이들에게 예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나눔과 기록, 사유와 실천이 결합된 그의 삶은 ‘예술가의 사회적 존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정웅은 수묵이라는 고전적 매체에 현대적 감각과 철학을 담아, 동양화의 새로운 길을 연 예술가입니다. 그는 먹과 선, 여백의 언어를 통해 인간과 시대, 자연과 존재를 이야기하며, 동양적 미학의 현대화를 실현했습니다. 또한 기증과 나눔을 통해 예술의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를 실천한 그는 단지 작가가 아닌 ‘시대를 살아낸 예술인’으로 기억됩니다. 수묵화의 새로운 가능성과 예술의 본질을 고민하는 이라면, 하정웅의 삶과 작품은 강력한 영감을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