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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폴 고갱 (원시성의 탐구, 색채와 신화, 예술의 유배)

by inkra 2025. 9. 4.

화가 폴 고갱 관련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19세기 후반 유럽 미술의 중심에서 벗어나, 문명으로부터 도피하며 원시성과 이상향을 찾아 나선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인상주의에서 출발했지만, 자신만의 색채 언어와 상징주의적 표현을 통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으며, 이후 표현주의, 상징주의, 야수파 등 20세기 전위 미술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갱의 원시주의, 색채의 상징성, 그리고 예술 철학을 중심으로 그의 예술 세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1. 화가 폴 고갱의 원시성의 탐구

폴 고갱은 부유한 중산층 출신의 해상 증권 중개인이었지만, 중년의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화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예술 활동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유럽 문명과 도시적 삶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외딴 지역을 향한 도피를 감행했으며, 그 정점에 타히티로의 이주가 있었습니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문명 세계와 단절된 순수한 삶, 인간 본연의 감정을 간직한 사람들과 마주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유럽과는 전혀 다른 자연, 문화, 신화를 경험하며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회화 속에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대작은 바로 이러한 타히티 체험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신화적 존재, 토착민 여성, 상징적인 동물과 식물들이 공존하며 하나의 꿈같은 내러티브를 구성합니다. 이 그림은 단지 타히티의 풍경이 아니라, 고갱이 상상한 ‘이상향’이며,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그는 타히티인들의 삶을 ‘야만적’이라고 보기보다는 ‘순수’하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유럽 문명이 잃어버린 영혼과 감정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이렇듯 고갱에게 원시성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현대 인간에게 잃어버린 본질을 회복하는 예술적 도피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갱의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회화 감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본능, 고독, 자유, 그리고 꿈에 대한 탐구입니다. 

2. 색채와 신화

고갱의 회화는 인상주의로부터 출발했지만, 인상주의가 추구했던 빛과 색채의 객관적 묘사에서 벗어나, 주관적 감정과 상징을 담아내는 방식으로 진화합니다. 그는 색을 단지 대상의 외형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신적,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갱은 피부를 녹색이나 보라색으로 칠하고, 하늘을 붉게 물들게 하며,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나 구조를 자유롭게 배치합니다. 이 같은 색채 사용은 상징주의 미술의 전형이며, 감정과 영혼의 언어로 기능합니다. ‘비전 이후의 설교’와 같은 작품에서, 천사와 야곱의 싸움이라는 성서적 장면이 전혀 다른 현실적 장면과 함께 배치되면서, 그림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상징으로서의 체험’을 제공합니다.

고갱은 이러한 색채 사용을 통해, **그림을 보는 이의 심리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예술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작품은 형상보다 분위기와 감정이 앞서 나갑니다.

또한 그는 여러 문화권의 신화와 전설을 작품에 도입하며, **다문화적 상상력의 원형**을 만들어 냈습니다. 타히티의 여신 히나(Hina), 불교적 사상, 고대 그리스의 신화까지도 그의 캔버스 안에서 융합되며, 하나의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창조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의 ‘월드 아트’, ‘글로벌 아트’의 시초로도 평가됩니다.

3. 예술의 유배

고갱은 스스로를 문명사회에서 유배된 자, 혹은 자발적인 망명자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본질을 탐구했고, 그것이 세속적인 성공이나 평단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종종 **자화상 속에서 자신을 성자, 그리스도, 혹은 야만인**으로 묘사하며,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신화화했습니다.

그의 후기 자화상들은 모두 자아 성찰적이며, 종종 어두운 색감과 강한 대조, 상징적 배경을 통해 ‘내면의 외침’을 시각화합니다. 이는 단지 얼굴을 그리는 초상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인간이 가진 고독, 갈망, 분노, 철학적 질문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타히티로의 이주 이후에도 고갱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건강 악화, 경제적 빈곤, 종교적·문화적 마찰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그는 예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문명의 쇠퇴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실을 찾기 위해 떠난 것이다"라고 말하며, 예술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최고의 수단임을 확신했습니다.

고갱의 작품은 이처럼 철저히 **개인적이고 철학적이며 동시에 시각적으로도 파격적**입니다. 그는 삶 전체를 예술로 바꾸었고, 예술을 삶의 전환점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행보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타협 없는 창작’과 ‘자기 세계의 구축’이라는 예술가 정신의 본질을 일깨워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