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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응노 해체와 재구성, 동서양 융합, 문자실험

by inkra 2025. 10. 20.

화가 이응노 관련

이응노(李應魯, 1904–1989)는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입니다. 그는 동양의 전통 서예와 문자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서구의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문자 추상’이라는 독창적 양식을 구축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양식적 융합을 넘어, 문자라는 기호를 시각적 리듬과 철학적 메시지로 확장시키는 조형 실험의 연속이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이응노가 문자 추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실험했는지를 중심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탐구합니다.

해체와 재구성 

이응노의 ‘문자 추상’은 한자를 단순한 쓰기의 도구가 아닌, 조형적 언어로 전환시키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동양 전통 회화와 서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자의 형태를 분해하고, 그것을 선과 점, 구조와 흐름으로 해체하여 회화의 중심 요소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유럽의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문자의 획 하나하나에 내재된 에너지와 구조적 리듬을 화면 전체로 확장시키며, 단어가 아닌 ‘형태로서의 문자’를 구성했습니다. 특히, 전통 서예에서 중요한 ‘기운생동’과 ‘획의 리듬’은 그의 회화 속에서 화면 전체를 구성하는 원리가 됩니다. 이로써 그는 문자의 의미를 지우면서도, 그 문자가 가진 정체성과 문화적 뿌리를 강하게 부각하는 역설적 미학을 구현했습니다. 그의 문자 추상은 반복과 리듬, 중첩을 통해 화면에 운동감을 부여하며, 동시에 한글, 한자, 기호 등이 뒤섞여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는 단일한 언어 체계를 넘어서 ‘초언어적 소통’을 추구한 것으로 해석되며, 문자와 기호를 인간 감각의 확장된 도구로 바라본 실험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응노의 문자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내면화한 문자추상은 이념적 대립 속에서 화가가 겪은 삶과 고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서양 융합

이응노는 한국과 일본에서 전통 수묵화와 서예를 배우며 조형의 기초를 닦았고,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서구의 현대미술과 조우합니다. 그는 마티에르와 제스처 중심의 유럽 앵포르멜 작가들과 교류하며, 동양의 선적 표현과 서구의 추상 미학을 융합하는 작업을 시도합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절충이나 혼합을 넘어서, ‘정신성’과 ‘형식성’의 교차점에 위치합니다. 동양 회화에서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여백의 미, 단순성과 직관적 표현은 이응노의 화면 구성에서도 주요한 미학적 요소로 작용하며, 이러한 사유는 서구 추상과 달리 ‘비움과 침묵’ 속에서 조형 언어를 조직해 나갑니다. 문자 추상은 이러한 동서양 미학의 충돌과 융합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물입니다. 그는 서예적 훈련을 통해 습득한 유연한 선의 흐름을 기반으로, 물질적 회화 재료인 종이, 화선지, 캔버스, 콜라주 등을 넘나들며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종이 콜라주 작업에서는 자른 종이 조각들이 문자처럼 재조합되며, 회화가 조형 언어이자 철학의 형태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응노는 “나는 동양에서 왔지만, 나의 작업은 동서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문자 추상은 바로 이러한 ‘경계의 미학’, ‘정체성의 실험’이자 ‘보편적 언어로서의 회화’를 향한 시도였습니다.

화가 이응노의 문자 실험

이응노의 예술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67년, 당시 이념적으로 복잡하던 시절, 한국전쟁당시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던 아들을 공산권 영토인 베를린에서 만나게 해 준다는 말에 갔다가 우리나라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발각되었습니다. 이것이 동백림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고, 한국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는 이후 무혐의로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은 그의 삶과 작업에 큰 상흔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감옥 속에서도 문자 추상을 계속 실험하며, 예술이 정신의 도피처이자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감옥에서 그린 수많은 드로잉과 습작은 이후 그의 파리 시기 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한층 더 압축적이고 기호적인 문자 표현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응노는 정치적 탄압을 견디며, 예술을 ‘진실을 말하는 형식’으로 전환시켰고, 그의 문자는 단지 조형 요소가 아니라 저항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한문, 한글, 기호, 선, 점 등을 자유롭게 변주하며 문자 추상을 극대화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조형 실험이 아닌, 존재의 본질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동아시아 미술과 서구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응노는 단지 미술가가 아니라, 문자와 언어, 기호와 의미의 관계를 탐구한 시각철학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보이는 것 너머의 의미’를 사유하게 하며, 회화가 어떻게 인간 내면과 시대의 현실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