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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우환 (모노하 운동, 여백의 철학, 개념미술)

by inkra 2025. 9. 22.

화가 이우환 관련

이우환(Lee Ufan, 1936~)은 동양의 철학과 서양의 미학, 그리고 행위와 사유의 경계를 오가며 ‘관계의 미학’과 ‘존재의 사유’를 예술로 형상화한 세계적인 개념미술 작가입니다. 그는 1970년대 일본의 모노하(物派) 운동을 이끌며 물질과 공간, 관객 사이의 관계를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올렸고, 동시에 한국 단색화 운동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이우환의 작품은 ‘무(無)’를 비우는 것이 아닌 ‘존재의 여백’을 드러내는 것이며, 반복과 행위를 통해 세계와 마주하려는 수행적 시도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우환의 시대적 배경, 예술 철학, 그리고 개념미술과 동양미학 사이에서의 경계를 분석합니다.

1. 모노하 운동

이우환은 1936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는 일본의 니혼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서양철학, 특히 현상학과 해체주의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동양의 유학과 선불교 사상을 통해 존재와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은 그의 예술 전체에 근본적인 뿌리를 제공합니다. 1960~7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기존 미술의 규범을 깨뜨리는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졌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에서도 예술에 있어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의 관계, 공간, 맥락을 중시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이우환은 이 흐름의 중심에 있었고, 대표적으로 ‘모노하(物派)’라 불리는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모노하는 말 그대로 ‘물건의 그룹’이라는 뜻으로, 자연물(돌, 유리, 철, 종이 등)과 인공물의 배치 자체를 통해 공간을 구성하고 관객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예술입니다. 이우환은 돌, 철판, 유리 등의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되, 그것이 놓이는 방식과 공간, 그리고 관람자의 이동과 관점을 통해 ‘존재 간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는 단지 형식적인 실험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유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예술을 ‘무엇을 그리는가’가 아니라 ‘존재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로 접근하며, 이후 그의 회화 작품에도 이런 철학은 일관되게 흐르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미술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7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전개된 단색화 운동은 서구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방식의 추상으로서, 수행적 반복과 물질의 조용한 생명력에 집중했습니다. 이우환은 직접 단색화의 대표 작가는 아니었지만, 그 철학적 이론과 사유를 제공하며 이 흐름의 지적 기반을 형성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2. 여백의 철학

이우환의 회화는 무엇보다도 ‘반복’과 ‘여백’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됩니다. 대표적인 회화 시리즈인 ‘점으로부터’(From Point), ‘선으로부터’(From Line) 시리즈는 붓을 들고 화면 위에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하나하나의 점과 선을 그려내는 작업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을 드러내는 수행이며, 작가의 행위가 물감의 양, 손의 압력, 호흡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면서 살아 있는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그는 붓질을 멈춘 공간을 ‘텅 빈 여백’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 공간 속에서 관계를 발생시키는 장으로 삼습니다. 즉, 여백은 단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점과 선, 관람자, 시간, 시선이 상호작용하는 ‘존재의 장’입니다. 이는 동양화에서 말하는 ‘여백의 미’와도 맞닿아 있으며, 비움 속에서 충만함을 발견하는 동양 철학의 미감을 현대 회화에 구현한 것입니다.

‘점으로부터’는 단 한 번의 붓질로 물감을 찍고 점차 사라지도록 붓을 들어 올리는 행위의 반복으로 구성되며, 이는 마치 숨쉬기, 걷기, 명상과 같은 행위로 비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아의 의지를 배제하고, 행위 그 자체를 드러내며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려 합니다. 따라서 이우환의 회화는 단순한 조형 작업이 아닌, 수행적이고 철학적인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을 중시합니다. 회화의 시간은 작가의 행위 속에 내재되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간과 만나며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이 점에서 이우환의 회화는 관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완성되며, 정적인 ‘그림’이 아니라 열려 있는 감각의 장으로 기능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예술은 드러냄이다.” 이 드러냄은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고, 익숙한 것에 낯섦을 부여하며, 그로 인해 관객은 자신과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이우환의 회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며, 반복과 여백 속에서 각자의 감각을 되찾게 하는 사유의 장입니다.

3. 화가 이우환의 개념미술

이우환은 세계 미술사에서 동양성과 개념미술을 연결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서양의 개념미술이 언어와 이성, 탈물질화를 중심으로 전개된 반면, 이우환의 예술은 동양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존재와 관계, 여백과 시간이라는 사유를 시각화했습니다. 그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설치미술에서도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대표적인 설치 시리즈 ‘관계항(Relatum)’에서는 자연석과 철판, 유리 등의 오브제를 공간에 절제되게 배치하여, 그것들이 서로 관계 맺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작품은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한 채 ‘존재들 간의 관계’를 스스로 드러내게 하며, 관객은 그 관계를 인식하는 행위를 통해 예술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철학은 불교의 공(空), 노자의 무위자연, 현상학의 지향성 등과 맞닿아 있으며, 단순히 미술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예술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주장하기보다, 침묵과 여백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말한다”라고 했으며, 이는 비어 있으나 충만한 동양의 미의식을 현대미술 언어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그의 작업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베니스 비엔날레, 베르사유 궁전 정원 등 세계적 전시에서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2014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초대 전시 작가로 선정되어 동양 예술가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영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이우환의 예술은 동양적인 동시에 보편적이며, 사유적이면서도 감각적입니다. 그는 물질을 배제하지 않고도 개념을 구현하고, 언어 없이도 철학을 말하며, 반복과 여백 속에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