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1928~2007)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단색화’라는 흐름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절제된 색조와 수행적 태도를 통해 깊은 존재론적 질문을 화폭 위에 남긴 작가입니다. 그는 흙색과 남색이라는 한정된 색으로 구성된 수직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그리며, 회화의 언어를 넘어서 인간 존재와 자연, 시간의 깊이를 탐구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조형을 넘어서, 침묵 속에 깃든 감정과 고통, 그리고 화해와 명상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이번 글에서는 윤형근의 삶과 시대, 예술 철학, 그리고 세계 미술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 보겠습니다.
1. 시대의 고통
윤형근은 1928년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 정권 하의 예술 탄압을 모두 겪은 세대였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와 사회의 혼란 속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1956년, 예술 활동을 이유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불온분자로 지목되어 투옥되는 사건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남깁니다. 이 사건은 윤형근에게 예술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으며, 이후 그의 작업은 점점 ‘침묵과 절제’의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에게 예술은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존재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화폭을 마주한 채, 단 한 번의 붓질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수행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그 침묵의 화면은 시대의 상처와 개인의 고통을 조용히 담아냈습니다. 그는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단색화’라는 흐름에 합류하며, 형식적으로는 최소한의 표현으로, 철학적으로는 존재의 본질을 향한 탐색을 시작합니다. 그에게 단색화는 단순한 양식적 유행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시대의 아픔을 감내하는 방식이자, ‘말하지 않음’을 통해 더 깊은 울림을 전달하려는 예술적 자세였습니다. 윤형근은 생전에 자주 “그림은 고통에 대한 응답이며, 침묵의 언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화폭은 과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인간과 역사, 자연과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가 응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2. 화가 윤형근의 색조
윤형근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색의 절제입니다. 그는 1973년 이후 흙색(번트엄버)과 남색(울트라마린 블루)을 주조색으로 삼고, 이를 혼합해 화면 전체를 채우는 방식을 일관되게 유지했습니다. 이 두 색은 각각 땅과 하늘, 육체와 정신, 인간과 자연의 상징으로 읽히며, 단순한 색조의 반복이 아닌 철학적, 존재론적 상징성을 갖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업 형식은 화면 좌우에 붓질로 길게 수직선을 그린 형태로, 이를 통해 그는 마치 문의 기둥처럼 존재의 경계를 암시합니다. 이 형태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구조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경계 사이를 응시하게 만들며, 안과 밖, 침묵과 고통,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게 합니다. 윤형근은 이 색과 형태를 통해 ‘비움의 미학’을 실현했습니다. 불필요한 설명이나 서사는 제거되고, 화면은 침묵과 수행의 공간으로 바뀌며, 관람자는 그 앞에서 존재의 근원을 감각하게 됩니다. 그는 물감을 캔버스에 밀도 있게 스며들게 하여 마치 천이나 토양처럼 자연스러운 질감을 드러냈고, 이를 통해 회화와 자연이 일체화되는 듯한 감각을 유도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반복적이지만, 결코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매 붓질은 다른 농도와 질감을 가지며, 시간의 흐름, 작가의 내면, 감정의 진동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미학적 표현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며, 그 안에는 살아 있는 시간과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색은 어둡고 무겁지만, 동시에 따뜻하고 포근합니다. 이는 절제의 미학이 단순한 억제가 아닌, 더 깊은 울림과 진정성의 표현임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는 “색이 너무 많으면 본질이 흐려진다”며, 존재의 깊이에 다가가기 위해 오히려 줄이고 덜어내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선택이야말로 윤형근 회화의 가장 강력한 미덕이자, 미학적 힘이었습니다.
3. 한국 미학
윤형근은 한국 단색화의 정수를 보여준 작가로, 그의 작품은 동양적인 사유와 미감, 그리고 서양 현대미술의 언어를 결합한 독창적인 미술 언어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적인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며 동시대적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는 한국의 전통 철학인 유학, 불교,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비움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으며, 이는 서양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결의 깊이와 감성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그는 작가로서의 ‘자기 제거’를 통해 그림 자체가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비주장적, 비 자기중심적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윤형근의 작업은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특별전, 2019년 베를린 현대미술관 전시 등 세계 주요 무대에 소개되며, 한국 단색화의 세계화를 견인했습니다. 또한 그의 생전 마지막 전시였던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 ‘침묵과 색’은 수많은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한국 미술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재조명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는 후배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예술을 삶의 진정성과 연결 지으려는 작가들에게는 중요한 철학적 기준이 되었습니다. 단색화가 단순한 양식적 운동이 아닌, 한국의 정신성과 미학을 세계 미술계에 알리는 핵심적 흐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윤형근과 같은 작가들의 존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작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윤형근의 미학은 지금도 전 세계 큐레이터와 평론가, 컬렉터들 사이에서 깊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비움과 절제, 존재와 사유를 탐색하는 동시대 미술 담론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을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