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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태호 (물성의 시간성, 반복과 구조, 한국적 추상)

by inkra 2025. 10. 9.

화가 김태호 관련

김태호(金泰浩, Kim Tae-Ho, 1948~)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물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극단까지 밀어붙인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그의 대표 연작 「내재율(內在律, Internal Rhythm)」 시리즈는, 수십 년에 걸쳐 끊임없는 물감의 층위, 선의 중첩, 삭면의 구조를 통해 조형의 본질과 회화의 존재방식을 질문해 왔습니다. 김태호는 단순히 형태를 추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원초적 탐구를 통해 물질성과 개념, 감성과 이성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습니다.

1. 물성의 시간성 

김태호의 회화는 우선 그 표면에서부터 압도적인 물성감을 전달합니다.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무수히 반복된 삭면과 선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물감의 두께가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축적된 ‘시간의 표면’이며, 동시에 작가의 몸짓과 사유가 기록된 조형적 궤적입니다. 그는 물감을 겹겹이 올린 뒤, 조각하듯 그 위를 긁어내며 새로운 선과 형태를 드러냅니다. 이 행위는 단순한 조형 기법이 아니라, 물질의 생성과 해체, 드러냄과 감춤이라는 이중 구조를 형성합니다. 보통 회화는 ‘올리는’ 예술로 인식되지만, 김태호는 오히려 ‘깎아내는’ 방식으로 회화의 근본을 전복합니다. 그의 대표작에서는 수직과 수평의 그리드가 반복되며, 각기 다른 색의 물감층이 깎여 나간 단면에서 독특한 조형 리듬이 발생합니다. 이 조형 리듬은 제목 그대로 ‘내재율’, 즉 화면 속에 숨어 있던 질서가 작가의 행위를 통해 드러난 결과입니다. 그는 그 구조를 차용하여 페인트로 선을 계속 그립니다. 수직으로 칠한 다음 캔버스를 다시 돌려 선을 이전 페인트 선과 수직이 되도록 칠합니다. 그런 다음 수평과 수직 구조로 다시 칠합니다. 어떤 비평가들은 태양 아래서 잔잔한 바다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비평가들은 벌집처럼 봅니다. 김태호는 회화의 물리적 표면을 해부하면서, 그 내부에서 조형적 질서와 추상의 논리를 동시에 끌어냅니다. 이러한 방식은 마치 고고학자가 땅을 파내 유적의 층위를 발굴하듯, 작가가 시간과 감정, 물질의 켜를 걷어내며 회화 속 세계를 찾아가는 행위와도 유사합니다. 김태호에게 물질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시간이 응축된 존재이며, 작가의 몸과 정신이 개입된 물리적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반복과 구조 

김태호는 초기에는 명확한 그리드 구조에 기반한 삭면 구성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조를 ‘해체’해가는 과정을 통해 더 깊은 추상성을 획득합니다. 초기의 정제된 구획은 점차 기울어지고, 해체되고, 때로는 무너지면서 오히려 더 높은 집중도의 내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변화합니다. 그의 작업은 ‘추상’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게 만듭니다. 서구 추상표현주의가 감정의 폭발이나 무의식의 표출을 중시했다면, 김태호의 추상은 반복, 균형, 질서, 침묵 같은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의 선과 면은 감각적이면서도 이성적이고, 즉흥성과 계획성이 공존하는 절묘한 균형을 유지합니다. 특히 ‘내재율’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작명 이상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화가 외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존재하는 구조적 리듬을 드러내는 행위임을 뜻합니다. 김태호는 조형 요소의 최소 단위인 ‘선’과 ‘면’을 통해 화면을 해체하고, 다시 그것을 조율하며 회화적 사유의 심연을 탐구합니다.

그는 "나는 붓을 잡기 전 이미 내가 무엇을 할지 알고 있다"라고 말했지만, 동시에 화면 앞에서는 그 계획이 끊임없이 수정되고 해체됩니다. 이 양면성은 김태호 회화의 중요한 미학적 지점으로, 추상이라는 것이 단지 구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식 안에 숨겨진 질서를 발견하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결과적으로 김태호의 회화는 추상의 물리적 한계, 형식의 경직성, 조형의 반복이라는 한계점을 끊임없이 밀어붙이며, 오히려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3. 화가 김태호의 한국적 추상

김태호의 회화는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입니다. 그는 동양화에서 비롯된 선과 여백, 반복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추상회화라는 서구적 언어로 치환해 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한 양식의 수용’이 아니라, ‘개념의 재정립’에 있습니다. 그의 화면은 물감의 층을 쌓고, 그것을 긁어내며, 내부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이 구조는 때로는 질서 있고 정교하지만, 때로는 파열되고 불균질 합니다. 이 양면성은 김태호가 한국 사회, 한국 회화의 정체성에 대해 던지는 메타적 질문으로도 읽힙니다. 그의 작업은 ‘한국적 추상이란 무엇인가’, ‘물질은 회화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시각적 응답입니다. 그는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아트페어에 초청받으며, 아시아적 정체성을 품은 추상회화의 국제적 가능성을 입증해 왔습니다. 서구가 주도하던 추상미술의 흐름에서, 김태호는 ‘감성의 밀도’와 ‘형식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추상의 경로를 제시합니다. 김태호의 회화는 결국 하나의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화면 위에 남겨진 물질은 그의 몸과 시간, 철학이 압축된 흔적이며, 감상자는 그것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리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회화, '묵상하는' 회화로 기능하며, 현대미술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시간성과 정신성'을 다시 일깨웁니다. 김태호는 물감, 선, 색, 구조라는 가장 근본적인 회화적 요소들을 통해 그 자체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 작가입니다. 그는 화면을 통해 시간과 사유를 쌓고, 물질을 통해 감정을 새기며, 추상을 통해 존재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양식적 추상을 넘어서, 철학적 탐구, 조형적 실험, 미학적 질문이 결합된 복합적 조형 행위입니다. 김태호는 한국적 정체성과 국제적 조형 언어의 경계에서, 추상미술의 미래를 제시하는 작가이며, 그의 ‘내재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미술적 언어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