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화가 권진규 (테라코타, 회화적 선, 한국적 미감)

by inkra 2025. 10. 6.

화가 권진규 관련

권진규(1922–1973)는 한국 현대조각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시각언어를 개발한 예술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석고나 청동이 아닌 테라코타(소조)를 주 매체로 삼아 인물의 내면과 감성을 조형화했으며, 조각에서 선의 조형미를 회화처럼 끌어낸 예술가입니다. 고요하고 명상적인 그의 인물상은 단단한 재료 속에 부드러운 선을 새기며, 조각이 가질 수 있는 감성적 깊이를 극대화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권진규의 조각 세계를 ‘조각과 선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1. 화가 권진규의 테라코타 

권진규가 주목받는 첫 번째 이유는 소재의 선택과 표현의 집중성입니다. 대부분의 조각가들이 청동이나 대리석, 나무, 금속 등 고전적 조각 재료를 선호하던 시기에, 그는 소박하고 거친 테라코타(소성된 점토)를 선택했습니다. 권진규는 테라코타의 거칠고 투박한 물성을 감정의 흔적을 담는 피부처럼 사용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여인상」, 「자화상」, 「소년상」 등은 모두 정적인 자세와 소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조형적으로는 섬세하고 강한 내면성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눈동자가 없이 매몰되거나 감긴 채 조각된 인물들은 마치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고 단단한 내면의 울림을 전달합니다. 권진규에게 인체는 단순한 형태가 아닌, 감정과 사유의 용기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형태와 반복되는 인체 비례 속에, 자신만의 리듬감 있는 조형을 담아냅니다. 이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접한 동양불상의 정적 미감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단순한 전통 계승에 그치지 않고, 권진규는 이를 현대적인 인물 조각의 어법으로 재창조합니다. 몸체의 비례는 전통적이지만, 목의 길이, 얼굴의 기울임, 입술의 모양 등은 그만의 정서적 해석을 담은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형상을 빚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응시하고, 정서를 기록하는 조형 행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권진규의 조각은 말하지 않지만 말하는 형상, 고요하지만 강한 울림을 지닌 ‘정적 조형’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2. 회화적 선

권진규 조각의 또 다른 핵심은 ‘선’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는 조각을 만들면서 동시에 선으로 조형을 감싸는 방식을 고안했습니다. 일반적인 조각이 형태 중심으로 부피와 질량을 강조한다면, 권진규는 조각 안에 선을 새기고 그려 넣는 방식으로 새로운 감각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테라코타로 인물의 윤곽을 형성한 뒤, 마치 드로잉을 하듯 표면에 날카로운 도구로 선을 그었습니다. 머리카락, 눈썹, 눈매, 입술 주변, 옷의 주름 등이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되며, 이는 조각이라는 장르에 회화적 요소를 과감히 도입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조각 위의 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선, 내면의 떨림, 그리고 정체성의 흔적을 따라가는 조형적 흐름으로 기능합니다. 특히 그의 자화상 조각을 보면, 날카롭고 절제된 선들이 얼굴의 굴곡과 감정을 분할하고, 응시의 무게를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조각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으로, 드로잉과 부조, 조각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융합된 독자적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선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인물의 표면은 매끈하지 않고, 선과 결이 엉켜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서 질서와 정적 미감이 생겨납니다. 이는 한국 전통 회화, 특히 선종(禪宗) 회화에서의 선의 직관성과 에너지와도 통합니다. 정적인 화면 속에서 흐르는 강한 선율은 관람자로 하여금 시선의 움직임과 감정의 파동을 동시에 경험하게 합니다. 이처럼 권진규의 ‘조각 속 선’은 회화의 영역을 조각으로 끌어오면서도, 그 자체로 조각적 언어가 된 독창적인 시도였습니다.

3. 한국적 미감의 체화

권진규의 조각은 외형적으로는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한국적 정서와 미의식이 체화되어 있습니다. 그는 민속적 이미지나 전통문양 같은 직관적인 상징을 활용하기보다는, 동양의 정적 미학과 한국인의 감수성을 깊이 있는 조형어법으로 번역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시끄러운 움직임이나 과장된 동세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인물들은 대개 눈을 감고 있으며, 포즈는 앉거나 서 있는 단순한 구도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고요함 속의 심연 같은 집중력, 그리고 긴장감이 흐릅니다. 이는 전통 한국화의 ‘여백의 미’와도 연결되며, 비워진 공간을 통해 감정을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그는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면서도 집단적인 한국인의 감정 코드를 동시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의 인물상은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지만, 누구나 감정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얼굴과 표정을 지닙니다. 이러한 조형 감각은 단순한 초상 조각을 넘어서, 정서와 정신의 조각으로 진화한 것입니다. 권진규는 생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1973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후 그의 작업은 재조명되며 한국 조각사의 결정적 작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오늘날 그의 작업은 모더니즘 조각의 한국적 변용으로 평가되며, 많은 젊은 조각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권진규는 ‘조각을 통한 사유’를 실현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물질로 감정을 만들고, 선으로 내면을 새기며,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였습니다. 조각이라는 장르에 선을 도입한 그의 실험은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조형언어 자체의 확장이자 한국 정서의 조형화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말하지 않지만, 오히려 말보다 더 깊이 감정을 전달합니다. 조각이 회화가 되고, 회화가 다시 조각 안에서 숨 쉬는 권진규의 세계는 지금도 살아 숨 쉬며 한국 조각의 본질을 다시 묻는 예술적 기준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당시 조각가의 현실에 좌절해서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그의 제자의 편지가 다시 회자되면서 제자를 향한 사랑에서의 좌절도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