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는 20세기 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로, ‘형이상학적 회화(Pittura Metafisica)’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세계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진실’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고요하고 낯선 도시 풍경과 초현실적인 상징들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데 키리코의 작품은 단지 미학적 시도로 끝나지 않고, 철학적 사유와 무의식의 탐구를 회화에 담아냄으로써 이후 초현실주의와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본 글에서는 그의 세계를 ‘고요한 도시와 시간’, ‘철학적 상징과 기호’, ‘초현실주의에 끼친 영향’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분석합니다.
1. 초현실주의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는 이후 등장한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안드레 브르통,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가 구축한 ‘논리적 현실 뒤의 세계’라는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데 키리코는 무의식과 꿈의 시각화를 가능하게 만든 선구자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달리는 데 키리코를 “정신적 스승”이라 불렀으며, 그의 이중 이미지, 정지된 시간감, 기묘한 광장 등의 요소는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브르통 역시 데 키리코의 작업을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의 원형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는 데 키리코가 현실의 재현을 거부하고, 감정과 논리를 해체한 방식이 잠재의식과 심리적 풍경의 표현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데 키리코 자신은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반기에는 고전주의 회화로 회귀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 작업은 초현실주의는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설치미술, 개념미술 등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데 키리코의 회화는 영화, 건축, 연극무대, 사진 등 다양한 시각 매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기하학적인 공간 구성과 조명 설계는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테렌스 맬릭, 데이비드 린치 등의 비주얼 철학에도 큰 영감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전시와 이론서에서 지속적으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2. 고요한 시간
데 키리코의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무도 없는 도시 풍경과 과장된 원근법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정적과 긴장입니다. 그의 대표작 《예언자의 거리(The Enigma of the Oracle, 1914)》, 《큰 메종의 회상》, 《철학자의 오후》 등에서는 인적이 사라진 도시광장, 긴 그림자, 비현실적인 건축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공간은 과거의 고전주의적 도시를 연상시키지만, 그 안에는 시간과 감정이 부재한 ‘정지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관객은 익숙한 듯 낯선 풍경 앞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며, 이는 작가가 의도한 실존적 고독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시각화입니다. 그는 “진정한 현실은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뒤에 숨어 있는 형이상학적 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관점은 그의 회화에서 흐르는 비정상적 조명, 어긋난 투시, 무인 공간 등으로 구체화되며,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사고의 상태를 묘사하는 화면으로 전개됩니다. 시간성 또한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데 키리코의 도시는 ‘어느 순간’에 고정되어 있으며,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혼재된 시간감각을 유도합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듯한 광장이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시계는 멈춰 있으며, 공간은 마치 꿈속의 설정처럼 추상화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정적인 세계는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의 감각을 의심하게 만들고, 현존의 불안을 직면하게 합니다.
3.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철학적 상징
데 키리코는 회화를 철학적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쇼펜하우어, 니체, 플라톤 등의 철학에 심취했으며, 이들의 사유 체계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작업에는 마네킹, 고대 조각, 기차, 석고상, 검은 그림자 등 반복되는 상징이 등장하며, 이들은 명확한 해석을 거부하고 사유를 유도하는 기호로 작용합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마네킹은 인간의 부재와 존재의 비인격화를 상징합니다. 얼굴이 없는 이 인형들은 자아가 사라진 인간, 혹은 인간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존재를 암시하며, 주체의 해체라는 주제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 마네킹은 ‘비정상적인 평온’ 속에 서 있으며, 관객에게 인간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고대 건축물이나 석상은 시간의 초월성, 역사적 순환, 존재의 영속성을 암시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립니다. 그는 회화 속에서 여러 철학적 개념을 암호처럼 배치하여, 그림 자체를 ‘읽는 철학서’처럼 기능하게 만듭니다. 그의 말처럼, “회화는 눈으로 읽는 시”이며, 각각의 기호는 사유의 단서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미적 구성 이상의 것으로, 데 키리코는 회화를 통해 철학, 존재론, 심리학,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탐험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관객이 능동적으로 해석에 참여하게 만들며, 예술을 사유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었습니다.